사각형이 된 사물의 그림자를 쓰다듬기
《Drag & Drop, 서연진, 한이경 2인전》, 유영공간, 2024.7.31.- 2024.8.11.
김맑음 (독립 큐레이터)
“우리는 고요하고 수수한 사물들을, 곧 평범한 것들, 평범한 것들 부수적인 것들,
혹은 통상적인 것들을 못 보게 된다. 자극성이 없지만 우리를 존재에 정박하는 것들을.”1)
사실 지금에 이르러 흰색의 벽에 작품을 거는 행동에 의문을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제 흰 벽은 대부분의 전시공간에서 충분조건이 되었고, 그 벽의 작품은 사람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눈으로 감상하는 것이 되었다. 당연하게도 시각예술로 불리우는 영역은 그렇게 견고해져 왔다. 우리는 익숙해진 지 이미 오래된 것이다. 과거 모더니즘 이후 브라이언 오 도허티(Brian O‘Dohertty)가 하얀 입방체인 화이트 큐브 이면에서 이데올로기를 발견할 수 있다고 언급하면서 흰색의 공간은 외부와 거리를 만들면서 사람들에게 영원하고 초월적인 경험을 하게 한다고 밝혔지만 말이다.2) 하지만 몇십 년이 지난 지금 어딘가에서 전시장을 돌아다니게 되면 이 경험이 점차 옅어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것이다. 물론 그 원인이 본 건축물의 구조를 반영하는 기존의 화이트 큐브에서 벗어나는 전시공간인 경우도 있겠지만 가장 큰 변화 중에 하나는 QR 코드의 등장일 것이다. 언제부터였을까. 그 시작을 돌이켜보건데 이는 화이트 큐브에 비해서 정말 찰나의 시간을 스쳐 지나가고 있다. 하지만 이는 전시장의 리플렛을 대신해서, 작품을 대신해서 검은색과 흰색의 무늬로 전시장 곳곳에 등장하고 있다. 그 시기부터 우리는 종이의 질감을 잃어버렸고 온전히 스크린 위 이미지로 작품을 보게 된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 이들은 손에 쥐어진 스마트폰 액정으로 바뀌었다. 그 흑백의 코드를 통해서 모든 사물들이 스마트폰 형태로 바뀌는 위상학적인 변화의 시대가 왔다고 말해야 될 지도 모른다.
터전을 몇 차례 이동했던 서연진, 한이경 작가에게 노마딕한 상황은 낯선 것이 아니다. 그리고 물리적인 이동, 특히나 사물과 함께 하는 이동은 필연적으로 제약이 따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사물에 대해서 “네모 반듯한 박스에 안에 담아야 하는 것으로 규격을 초과하거나 너무 무겁지 않아야 했”3)던 것으로 정의 내렸다. 이 정의에서 '네모 반듯한'이라는 문구에 이끌린다면 유난히 《드래그 앤 드롭》전에서 사각형의 프레임이 많이 눈에 들어옴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서연진 작가의 〈Gourment Butter Flavour〉에 있는 쌓인 벽돌들과 〈Tearing Time〉에서 보이는 모니터 테이블, 한이경 작가의 〈복복복(BOKBOKBOK)〉에 등장하는 창문, 〈Physical Vocabularies〉의 박스와 치즈 치즈처럼 보이는 포스트잇까지. 이 사각 형태는 일견 스쳐 지나갈 수 있는 것이지만, 작가들이 사물과 함께 이동할 때 경험했던 규격과 규칙에 맞물려 생각해보아야 한다.
여기에서 앞의 전시공간의 흐름에서 드러난 사각형의 위상학적 변화를 함께 떠올려보자. 화이트 큐브는 QR 코드를 통해서 그것의 옅어진 초월성을 다시금 구축하고 있다. 이 과정은 궁극적으로 사각형의 스마트폰 스크린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전시가 가지고 있는 미세한 질감은 여기에서 납작하게 미끄러지고, 우리는 정말 실제 사물이라고 칭하기 어려운 '페이지'를 눈으로 보게 된다. 작가들이 이동을 하는 과정에서 경험했던 것들, 이를테면 사물을 규격에 맞추고 무게를 넘지 않게끔 조정하는 행위는 더 이상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시 제목에 등장하는 ‘드래그-앤-드롭(drag and drop)’은 집 꾸미기 게임에서 마우스의 움직임을 연상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천장에 서까래가 남아있어 완전한 화이트 큐브에 해당되지 않는 전시공간을 다시금 살펴본다. 서연진과 한이경은 작업은 마치 누군가가 거주하고 있었던 곳이라고 여길 수 있을 정도로 일상 속의 사물처럼 보인다. 아니 실제로 사물이 중간중간 등장하고 있기도 한다. 일상의 한 모습으로 생각되는 만큼 우리의 눈은 스크린을 흘러가듯이 빠르게 전시장을 훑을 수 있다. 하지만 이내 서연진 작가의 작업에서 익숙한 QR 코드를 발견하는 이들은 바로 스마트폰으로 촬영에 돌입할 것이다 그리고 . 열리는 꽃봉오리와 튀어오르는 빵이 작업에 덧붙여지는 것을 보게 된다. 이에 더해서 작업 〈버블가능구역(Designated Bubbling Area)〉은 실제로 숨을 불어넣어야 비누방울이 보이게 된다. 숨을 불어 넣는다는 행위는 마치 어떠한 것처럼 보인다는 프랑스어 숙어 ‘avoir l'air de’를 떠올리게 하기도 하는데, 이는 직역하자면 '~의 공기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연달아 나오는 버블이 스크린의 안에서 실제 사물을 닮았는가에 답을 해야한다면 이 작업은 오히려 그 간극에 대해서 유희적으로 펼쳐 놓는다. 그러다 문득 전시장을 살펴본다면, 앞서 일상 속의 사물들로 보였던 한이경의 작업들을 표면에 의문이 들 것이다. 실제 빵이 저러한 색상이었을까. 손을 댈 수 없는 초콜릿 도넛에는 왜 향이 나지 않는가. 면 양말로 보였던 것은 왜 무거워 보이는가. 어쩌면 렌티큘러로 바뀌는 〈Super Flat Sweetness〉나 고양이 이미지처럼 말이다. 이들은 그 일상의 사물이 아닐 수도 있었던 것이다. 시각에 의존할 수 밖에 전시의 필연적인 규정과 규칙에 이는 어쩌면 도전하는 것이라 읽을 수 있다. 한이경 작가의 〈Physical Vocabularies〉는 실제 치즈와 동일한 색의 포스트잇을 배치하면서 의문을 키우고, 〈Sort of Secrets #2〉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간극을 극대화하고 있다. 가벼운 풍선이 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매스를 이루고 있는 재료는 그 무게로 중력을 이겨내는 중이기 때문이다. 창문 밖으로 고양이가 보고 있는 소녀의 이야기를 함께 해보자. 고양이를 자세히 보기 위해서 한 소녀는 엄지와 검지로 유리를 만지고 확대 동작을 한다. 마치 터치스크린을 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이내 터치스크린이 아님을 깨닫고 “잠시 동안 방향 감각을 잃는다. ... 그리고 또 다른 방향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 맞딱들인다”4) 그녀가 했던 손가락의 움직임을 상상해 보자. 고양이의 이미지가 배경과 구분되는 경계에 두 손가락을 우선 맞추었을 것이다. 그리고 찬찬히 손가락의 거리를 넓혔을 것이다. 이미지를 탐색하는 또 다른 방향은 이처럼 “디스플레이로서 터치스크린 인터페이스를 세상에 존재하게 하는 손가락의 촉각적 능력”5)에 기반한다. 우리는 이 손가락에서 시작하는 언어를 QR 코드 이미지에서 팝업으로 뜨는 페이지를 쫓느라 떠올릴 겨를이 없었다. 체화된 기억을 되살리기보다는 사각형 스크린에 미끄러지기 바빴던 것이다.
사진이 기록 자체가 된 지금, 전시에 대한 기억을 소환했을 때 결국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이미지뿐이다. 이 전시는 사물의 그림자는 점점 스크린 속의 사각형 이미지가 되고 있지는 않는지 이야기한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당연히 어색하겠지만, 눈으로 드래그와 드롭을 하면서 사각 프레임 안에 있는 사물을 꺼내보게끔 한다. 눈을 통해 그 사물을 촉각적으로 감각해보자. 이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사물을 닮은 공기를 부드럽게 이미지에 불어 넣는 것이다.
1) 한병철, 『사물의 소멸』, 전대호 옮김 (파주: 김영사, 2022), p. 9.
2) 브라이언 오 도허티, 『하얀 입방체 안에서』, 김형숙 옮김(파주: 김영사, 2006); Brian O'Doherty, Inside the White Cube: The Ideology of the Gallery Space (San Francisco: The Lapis Press, 1986).
3) 《드래그 앤 드롭》(유영공간, 2024) 서문 발췌.
4) Doreen Mende, “The Code of Touch: Navigating Beyond Control, or, Towards Scalability
and Sociability,” e-flux journal, Navigation Beyond Vision (London: Sternberg Press, 2023), pp. 228-229.
5) ibid. pp. 230-231.